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7천인 대회 (문단 편집) === 마오쩌둥의 연설 === 1월 30일, 마오쩌둥은 린뱌오의 말을 이어받아 7천인 대회에서 즉석 연설을 발표했다. 그는 녹음 원고를 1회 수정한 후 비서 톈자잉(田家英)에게 정리하게 했지만 나중에 원고가 만족스럽지 못해 녹음 원고를 다시 회수한 후 몇차례 수정 작업을 거쳤다. 그후 그는 자신의 연설 원고를 9부 인쇄해 류사오치, 저우언라이, 덩샤오핑에게 한 번 봐달라고 지시했고 펑전과 천보다에게 각각 한 부를 줬다. 마오쩌둥의 1962년 연설 원본은 현재 소실된 상태이며 1966년판 연설문은 1962년 판의 내용을 부분적으로 삭제했다. 일설에 따르면, 류사오치가 문화대혁명 직전 마오쩌둥의 동의를 얻어 삭제한 내용이 텐자잉이 가지고 있던 녹음판에 담겨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고 한다. >"다른 사람은 나보다 잘 알고 있다. 덩샤오핑 동지는 나보다 잘 알고 있고 저우언라이 동지도 나보다 잘 알고 있고 [[천윈]] 동지는 특히 많이 알고 있다." 또한 1962년판 원본에는 마오쩌둥이 류사오치가 연설에서 "최근 4년 동안 우리의 노선이 정확하고 주요 성과를 거뒀으며 실제 작업에서 약간의 실수를 범하고 쓴맛을 봤지만 우리는 더욱 강해졌지 더 약하지 않다."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내용이 기술되어 있으나 1966년판에 삭제되었다고 한다. >"물론, 누명은 항상 있다. 류사오치 동지 보고서에 누명이 많이 있었는가? 분열주의는 누명이 아닌가? 그러나 함부로 누명을 씌우는 경향이 있다. 장삼 분산주의, 이사 분산주의, 누구라도 분산주의로 몰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인지는 1962년판 원본이 존재하지 않기에 확실하지 않으며, 마오쩌둥이 7천인 대회에서 발언한 내용은 1966년판에 근거해서 알아볼 수밖에 없다. 1966년판 연설문에서, 마오쩌둥은 분산주의에 반대하는 것이 옳다면서도 집중통일에 앞서 민주적인 것을 먼저 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민주집중제를 입에 올리면서 각급 간부가 분산주의에 반대한다는 공감대를 일으키기 전에 하급 간부에게 먼저 속마음과 진실을 털어놓고 그들로 하여금 화를 내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마오쩌둥은 동시에 "빚을 갚지 않고, 타격을 주지 않으며, 보복하지 않는다"며 하급자가 상급자를 비판하고 지방이 중앙을 비판하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레닌주의의 기본 원칙은 하급자에게 복종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엄한 어조로 상급 간부를 비판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스스로 모범을 보이고자 자신에게 가해지는 모든 비판을 허용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자아비판한 관료들에게 더이상 책임을 묻지 말자고 주장했다. 장문기(張文奇) 전 중국 도시계획 설계원 고급도시 계획사의 회고의 따르면, 마오쩌둥은 자신의 연설이 모두를 감동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즉시 비판과 자아비판을 전개해야 하기 때문에 연설을 한 후 직접 지휘하여 성과를 검증하겠다고 밝혔다. 2월 1일 저녁, 마오쩌둥의 지시에 따라 화북, 동북, 화동 3개구에서 먼저 자아비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는 현재 남아았지 않아서 일부 학자들은 중국 당국이 이를 공개할 수 없는 내부 사정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아무튼 이들의 뒤를 이어 왕런중 후베이성위 제1서기, 류쯔후 허베이성 당서기, 타오주 산시성 당서기, 장중량 전 간쑤성 당서기 등이 잇따라 자아비판했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마오쩌둥의 대약진 운동에 대한 책임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오쩌둥의 독려에도 불구하고, 현위원회의 지당 서기들은 성 서기의 위엄에 여전히 짓눌려 있었고 그들이 미래에도 집권할 가능성을 고려해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마오쩌둥은 정치국 상무위원과 총비서, 중앙판공청 주임을 읍에 파견해 이들을 독려하게 했다. 그렇지 않으면 현 위원회와 지방 위원회가 여전히 서로를 마주보 며 침묵을 지키기 때문이었다. 류사오치와 저우언라이는 안후이와 푸젠조, [[주더]]와 천윈은 산시조, 덩샤오핑은 쓰촨성조에 갔다. 안후이성 서기 쩡시성은 군중 앞에서 잘못을 반성하고 "동급과 하위에 대해 비민주적이거나 펴등한 태도로 사람을 대하지 않겠다."고 솔직하게 고백했다. 이에 현 관원들이 류사오치의 독려에 힘입어 쩡시성에게 비판을 퍼부었고 어떤 이는 병이 나서 공동급식소에 가지 못해 굶어죽은 이들이 허다하다며 욕을 퍼부었다. 저우언라이가 간 푸젠조에서도 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푸젠성 당서기 예페이(葉飛)는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채 하급자에게 사죄해야 했다. 반면 덩샤오핑이 간 쓰촨조는 한동안 아무도 감히 성 서기를 비판하지 못했지만 덩샤오핑이 지속적으로 채근하자 그제서야 비판이 오갔지만 그 정도는 그리 강하지 않았다. 결국 덩샤오핑은 쓰촨성서기 리징콴에게 식량을 조달하느라 수많은 이들을 아사시킨 것에 자기 비판을 해서 자신의 체면을 세워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하지만 현, 시 위원회 대표들의 성 서기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전반적으로 미적지근했다. 이론 상으로는 모든 당내 비판과 자기 비판은 "무보복, 무처벌" 원칙을 준수해야 하지만, 현위원회와 지당 서기는 상부의 엄명하에서 끊임없이 높은 통제와 평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또한 그들은 과거 [[정풍운동]], [[삼반오반운동]], [[반우파 투쟁]] 및 루산회의 이후의 우경주의 타파 운동을 겪으면서 복지부동의 태도가 몸에 배여서 감히 나서지 않으려 했다. 당시 7천인 대회에 참가했던 우파셴(吳法憲) 공군 사령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7천인 대회에 참가한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모두 마오쩌둥의 '대약진'호소에 호응했다. 아래는 다소 잘못을 말했고 약간의 잘못을 저질렀다고 시인했다. 따라서 일단 객관적인 상황이 반영되었다. 그러나 실제 상황에서는 자신에게 누명이 덮어질 수도 있었다. 정말 이렇게 되면 관직을 유지할 수 없었다. 또한 그들은 펑더화이가 루산에서 실각당하고 비판을 받아 '반당 그룹'으로 규정되었던 기억이 생생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의심이 생기게 하여 감히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못하게 되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절대로 밝힐 수 없다며 입을 굳게 다물었다. 이런 회의에서는 민주집중제를 발양할 수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